1. 쓸데없는 말
미국에 있을 때,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에 있는 '알라딘US'에 가서 책을 찾아보는 버릇이 있었다. 책을 꾸준히 주기적으로 읽는 습관은 없지만, 무료로 주차할 수 있는데다 혼자 시간을 보내거나 '책 읽는 사람인 척'을 할 수 있던 공간이라 그랬던듯?
한국 정가 14,000원, 알라딘US에서 구매가 $19.62(아마 Tax까지 따지면 20불 넘었겠지.) - 우리 돈으로 2만 원이 넘는 가격인데, 사실 한글로 된 책을 가져오는 게 여러모로 위험 부담이 있으니까, 시장도 작고(비록 LA가 전 세계에서 한인이 제일 많은 도시긴 하지만), 무겁기도 하고...게다가 무라카미 하루킨걸! 하며 샀었는 데, 한국에 돌아온 지 2개월이 넘어서야 읽었다. 무려 회사 면접을 땡땡이치고!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 양복도 빼입고, BB크림도 바르고, 머리도 만졌는데 버스를 타자마자 와버린 궁극의 현자타임.(다른 용어를 찾을래도 이것 밖에 표현할 만 것이 없다.) 한국에 귀국하여 취업시장에 뛰어들었을 때엔,
'그래, 어떤 회사든 경험은 중요한 것이니 면접은 가리지 말고 보자!'
...라는 각오였는데, 면접을 몇 번 보다 보니, 그리고 결정적으로 (회사 자체는 내실 있어 보였지만) 근처 지하철역까지 가는 버스에서 확인한 평균 연봉 정보가-과연 출근 시간 다른 회사원들과 함께 지옥의 대중교통에서 뚝섬까지 1시간 30분 넘는 이동 시간을 할애하여 금전적 보상이 크지 않은 회사에서 면접을 보는 게 맞는가-라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회의심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담당자에게 '너무 늦게 알려 드려' 죄송하다며 문자를 보냈다. "예스맨"이었던 담당자는 모든 메시지는 한글이었지만 문자메시지의 시작을 "예스 (이하 내용)..."로 하는 특이한 스타일이었고, 면접 불참 통보 메시지에도 "예스 괜찮습니다."라고 해주셨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가기엔,"아 그냥 안 갔어"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기엔 스스로 너무 게을러 보이니까 시간을 때우기 위해 찾은 역 근처의 스타벅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학생들이나 회사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있었다. 라떼를 시켜 가장 구석의 의자에 앉아서 책을 폈다. 대중교통에서 책을 읽는 편은 아닌데, 왜 가지고 왔는지 모르겠다. 가방이 너무 텅텅 비어있어 그랬나...
2. 그래서 책은요?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었다. '티셔츠'에 관한 책임만큼 티셔츠 사진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하루기 특유의 '술술 읽히는 문체' (물론 다른 소설에서의 형이상학적 표현을 제외하면 수필인 이 책은)는 라떼 한잔, 2시간 만에 책을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흔히 입는 티셔츠라는 소재로 책을 낼 수 있구나...하며 하루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본문에서 어느 편집자의 제안으로 시작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아마 하루키의 팬, 흥미를 기반으로 한 에세이였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오렌지백셰프T' 라고 해도 아무도 내가 어떤 티셔츠를 입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거잖아요.)
미국에서 사온 티셔츠("I PUT MY KETCHUP ON MY KETCHUP"글귀가 하인즈 마크에 그려진 빨간 티셔츠였다.)에 관한 에피소드는 내 미국 생활을 생각나게 했다.
여행으로 미국에 간다. 세관을 통과하고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에 자리 잡자 마자
'어디 가서 햄버거부터 먹어야 해'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어떠신지? (후략)
(본문 p.22)
당연하죠!
특히 친구들이 미국에 놀러 올 때면, '아 비행기 내리자마자 배고플 테니 공항 근처의 인앤아웃(In-N-Out)에 데려가야지'하고 데려갔었다. (평가는..'그냥 싸고 괜찮네' 정도?)
미국에서 살던 집 근처에 유명한 일식당 이자카야가 있었다. 미국 식당같지 않게 새벽 영업을 하고 맛도 있어서 항상 붐비던 곳인데, 유명한 식당인건 알겠어, 근데 티셔츠를 팔아? 의아했다. 저걸 누가 사려나...물론 이케아나 인앤아웃처럼 브랜드 네이밍과 패션 아이템으로 수요가 있을만한 티셔츠는 아니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는 아마 하루키 같은 사람이 사겠구나, 싶었다.
이렇게 공감과 일상 묘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어디서 샀어.' 정도가 아니라 티셔츠와 관련된 당시의 상황, 심상, 추억, 대화 내용을 잘 버무려 독자들에게 잘 만들어진 '이야기'로 전달하는 이 에세이는 일상적 묘사의 소소한 공감은 물론 하루키의 삶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런 것들을 다 어떻게 기억하고 써내는 걸까? 모든 일상과 순간을 기록하고 메모하는 것인가? 혹은 상상력의 산물인가..?
에세이를 읽으며 부끄러웠던 점은 하루키같은 사람들도 빈티지 티셔츠를 사입고, $3.99짜리 티셔츠를 살 때면 '고민하게 된다.'는데 그 이상의 값을 아무렇지 않게 내는 나의 소비 패턴에 대한 반성. 보통은 4~5만 원 정도지만 내가 가진 티셔츠 중 가장 비싼 것은 미국에 있을 때 산 메종 키츠네(Maison Kitsune)와 아더 에러(Ader Error)의 콜라보 작품인 블루폭스 티셔츠인데, 정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할인가 $150 정도에 구매했던 것 같다.
결론은 역시 포장보다는 내실이 중요하구나. $150짜리 티셔츠로 과시욕과 자기만족만 채우는 나보다는 $1.99짜리 중고 티셔츠를 사더라도 사연이나 추억, 나의 관심사가 깃든, 그래서 (책이든 절약한 돈이든, 사연이든 추억이든) 뭔가 남길 수 있는 편이 낫겠구나 싶었다. + 책에 안 나와서 그렇지 명품 티셔츠도 한 장 정도는 있겠지? 하루키 정도면?